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야 문명 (문단 편집) == 건축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nxo-mijan-marono-gran-plaza-ma.jpg|width=300]]}}}||{{{#!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nxo-mijan-kkk-ma.jpg|width=400]]}}}||{{{#!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49656067206_798345637b_c.jpg|width=387]]}}}|| ||티칼의 복원도[* 현재와는 달리 피라미드에 모두 색이 입혀져 있었다.]||피라미드의 내부 구조. 겹겹이 피라미드들이 덧씌워진 구조이다.||[[코판]]의 '로살릴라 신전'[* 놀랍게도 현대 재현물이 아니라 '''실제 당시 건물 그대로의 모습'''이다. 마야인들이 이 사원 위에 새 사원을 그대로 덮어씌우는 식으로 공사를 진행했고, 그 덕분에 기적처럼 거의 완벽에 가까운 상태로 보존될 수 있었다.] || 마야 문명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 것이 정글 속 거대한 규모의 피라미드들과 아름다운 사원들이다. 먀야의 건축가들은 도시를 지을 때에 기본적으로 계획도시를 짓거나 하는 일은 없었고, 그때그때 필요할 때마다 도시의 구역들을 확장하면서 숲을 밀어내고 새로운 건물들을 지어 올렸다. 마야의 도시 한중앙에는 넓은 크기의 광장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그 광장 주위를 여러 피라미드들과 왕의 궁전, 사원들, 구기 경기장[* 마야의 구기 경기는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었다. 신에게 바치는 예식과도 비슷한 퍼포먼스였고, 실제로 구기 시합에서 진 팀의 선수들이 제물로 바쳐질 정도로 살벌했다.] 등이 둘러싸고 있었다. 이 광장과 석조 건물들을 포함하여 마야의 [[아크로폴리스]]라고 부르는데, 마야의 도시들은 모두 이 아크로폴리스를 중심으로 풀과 나무 등의 재료들로 지은 평민들의 가옥들이 둘러싸고 있는 구조였다. 다만 시간이 흘러 도시들이 버려지자, 썩기 쉬운 풀과 나무로 된 평민들의 주택들은 모두 썩어 사라졌고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돌로 만들어진 아크로폴리스 유적들 뿐이다. 도시의 건물들 사이는 '사크베'라고 해서 석조 보도들이 깔려 있어 비가 내릴 때에도 질척질척거리지 않도록 만들었다. 마야 건축의 꽃이자 대표는 단연 [[피라미드]]이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들과는 달리, 기본적으로 층층이 단을 쌓아 올려 만들었으며 꼭대기까지 향하는 계단이 외벽에 나있고 맨 위에는 석조 사원이 자리하는 구조였으며, 천문대와 사원, 무덤의 기능을 모두 겸하는 마야 도시의 핵심 구조물이었다. 마야어로는 '쿠 나(K'uh nah)'라고 불렀다고. 왕과 도시, 그리고 그 도시의 신을 상징하는 권위와 다름없었기에 피라미드를 지을 때에는 온 도시의 인력들이 들러붙어 지었다. 제일 먼저 흙과 자갈들을 쌓아 둔덕을 만들었고, 그 둔덕을 포장돌로 감싸 외벽을 만들었으며 꼭대기에 사원을 짓고 외벽을 석회로 발라 마감처리하고 장식을 넣었다.[* 마야의 피라미드는 이집트와 달리 완전히 암석으로 지어진 것이 아니다. 겉의 포장돌을 몇 개만 벗겨내보면 그대로 안의 흙과 자갈이 나온다.] 또한 독특한 것이 피라미드를 새로 증축할 때에는 허물고 새로 짓는 것이 아니라, 아예 기존의 피라미드 위에 새로운 피라미드를 '''덧씌워서 지었다.''' 이때문에 현재 마야의 피라미드 대부분은 벽면 아래에 옛날에 지어진 더 크기가 작은 피라미드들이 겹겹이 들어있는 구조로, 마치 러시아의 [[마트료시카]]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또한 색이 다 벗겨져 돌만 남아 황량한 지금의 모습과는 달리, 전성기 시절 마야의 피라미드에는 신성한 색인 붉은색 염료가 칠해져 눈이 어지러울 정도였으며, 꼭대기의 빗돌 장식물에도 푸른색, 초록색, 붉은색, 금색 등 다양한 색들이 입혀져 있었다. 간혹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마야의 피라미드를 비교하는 경우가 있는데, 실제로 굉장히 정밀한 수학적 계산과 엄청난 노동력을 요했던 이집트의 것과는 달리, 마야의 피라미드들은 생각보다 정밀한 기술력이나 계산을 요구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피라미드 내부에는 왕들이나 귀족들의 무덤들이 있는 경우도 많았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팔렝케 유적의 [[키니치 하나브 파칼]] 왕의 무덤이다. 파칼 왕은 무려 68년이라는 엄청난 세월동안 장수하면서 팔렝케의 전성기를 이끈 명군이었는데,[* 당시 마야의 위생상태와 전염병에 걸리기 쉬운 열대우림 지역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건 정말 대단한거다.] 그의 무덤이 바로 팔렝케의 피라미드인 '비문의 신전' 지하에 잠들어 있다. 파칼 왕이 묻힌 석실은 꼭대기의 신전 바닥에 나있는 기다란 계단 복도를 타고 내려가면 나오는 조그마한 석조 방인데, 발굴 전에는 이 복도가 모두 자갈로 채워져 도굴을 방지하고자 했다. 석실 내부에는 파칼 왕의 유해가 전혀 훼손되지 않은 채로 그대로 놓여 있었고, [[비취]]로 만들어진 [[데스마스크]]와 옥으로 만든 각종 부장품들이 함께 매장되어 있었다.[* 고대 마야에서는 황금보다 더 귀한 대우를 받았던 것이 바로 [[옥]]이었다.] 파칼 왕의 무덤은 마야 고고학 역사상 최대의 발견으로 인정받으며, 거의 이집트의 [[투탕카멘의 무덤]] 급 대성과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게 왜 대단한 것이냐면 이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신전과 왕들의 무덤들은 마야인들이나 모험가들에 의해 도굴이 되어버리거나 털려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마야인들은 몰래 잊혀진 신전이나 왕궁에 들어가 무덤을 파헤쳐 도굴하는 일이 많았다.] 파칼 왕의 무덤은 전혀 어지럽혀지지 않은 채로 보존되었고, 심지어는 석실에 그려진 벽화마저도 채색이 유지된 상태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이 무덤은 파칼 왕이 마야의 수많은 국왕들 중 가장 유명한 이유이기도 하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nxo-mijan-marono-palacio-ma.jpg|width=344]]}}}||{{{#!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Ruinas-de-palenque-méxico-6.jpg|width=391]]}}}||{{{#!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Mayan-Architecture-31.jpg|width=170]]}}}|| ||[[팔렝케]]의 왕궁 복원도 ||팔렝케 왕궁 유적의 내부 ||피라미드 사원 내부 || 왕궁도 있었다. 국왕이나 귀족들이 모여 살던 왕궁은 대부분 석재로 지어져 있었으며, 물이 잘 고이지 않는 도시의 고지대나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평민들이 풀과 나무를 엮어 지은 부실한 가옥들에 몰려 사는 동안, 신과 동일한 대우를 받았던 왕들은 수많은 방들을 가진 궁전에서 호의호식하며 호화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왕궁은 단층 구조였고, 일부 궁전들은 2층이나 3층까지 올려 짓기도 했다. 또한 무덤을 왕궁 내부의 지하에 파서 시신을 안장하는 경우도 있었기에, 도시의 멸망 이후 도굴꾼의 표적이 되는 경우도 종종 일어났다. 왕궁 외에도 독특한 건물로는 천문대가 있었다. 천체의 운행에 관심이 많았던 마야인들은 천문대를 지어 주로 [[태양]]과 [[달]], [[금성]]의 운동을 관측했는데, 사실 딱히 천문대에서만 관찰한 것은 아니고 높은 건물이나 산처럼 높은 곳이라면 어디에서든지 하늘을 관측했다고 한다. 흔하게 마야의 천문대라고 치면 나오는 원통형의 건물은 마야의 최고신 [[쿠쿨칸]]을 섬기는 신전들 중 하나이다. 마지막으로 구기 경기장이 있었다. 마야에서 구기 경기는 목숨을 건 신에게 바치는 예식이었고, 패배자들은 제물로 바쳐질 정도로 굉장히 살벌했다. 주경기장은 양 옆에 기다랗고 높은 벽이 2개 서있는 구조로, 그 벽에 고리가 달려 있어 이 고리 안으로 고무로 된 공을 던져 넣으면 점수를 얻는 경기였다. 이 구기 경기장은 마야 도시 대부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마야인들의 피라미드나 건물 내부를 보면 그 거대한 크기와 달리 매우 협소한 편이다. 건축술이 발달하지 못해 [[아치]]의 개념을 몰랐던 탓이 컸다. 아치가 없어서 '코벨 아치(Corvel Arch)'라는 방법을 사용해 천장을 지탱했다. 코벨 아치란 벽에서부터 비스듬하게 돌들을 쌓아 천장에서 만나 맞대어 서로 지지하게 만드는 형식의 지지 방식이었는데, 아치보다 더 불안정하고 만들 수 있는 내부 공간도 훨씬 적었다. 게다가 마야인들은 피라미드 꼭대기에 사원을 지을 때 장식용으로 건물 위에 거대한 빗돌을 얹었는데, 이 빗돌의 엄청난 하중을 견디기 위해선 벽을 최대한 두껍게 만드는 수 밖에 없었다. 안그래도 코벨 아치 때문에 좁은 공간에 벽마저 두껍게 만드니 더더욱 좁아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왕궁이나 귀족 저택 역시 별로 다르지는 않아서 그 크기에 비해서 내부는 꽤 좁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